*본 글은 김경호 교수님으로 인해 쓰게 되었다.
고봉 기대승의 '기機', '세勢', '사死'에 대한 언급과 ,사단(사단칠정 중 네가지 단서)에 대한 언급이 었다.
선생이 남쪽으로 내려오던 날,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이 모두 한강(漢江)에 나와 전별하였다. 이때 배 안에 앉아 있던 어떤 객이 선생에게 “사대부가 조정에서 처신할 때 시종 명심하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선생이 이에 대해 “기(幾)ㆍ세(勢)ㆍ사(死) 세 글자면 더 말할 것이 없겠지요.”라고 대답하였다. 이 뜻은 대체로 군자가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서 의당 먼저 기미를 살펴 의리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하고, 나아가 시세(時勢)를 알아서 구차하게 되는 걱정을 없게 하며, 마침내는 목숨을 걸고 도(道)를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김경호 교수님께서는 "의당 먼저 기미를 살펴 의리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하고, 나아가 시세를 알아서 구차하게 되는 걱정을 없게 하며, 마침내는 목숨을 걸고 도(道)를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구절을 중요하게 설명하셨는데, 여기서 설명함에 한계가 있었다. 사전에 공부를 하고 꾸준히 실천하지 않는 이상 깊이 탄복하기 힘든 것이다. '일필휘지' 한 번에 붓질로 글 혹은 그림을 완성 하는 것 처럼. 삶 자체가 꾸준한 실천(의리)과 공부가 되지 않으면 임하기 힘든 학문이다. 현대에는 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한국철상, 사상이 '사장 학문', '죽은 학문'이라 슬프게 들리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연관이 없거나, 죽은 것이 아니다. 잠들어 있을 뿐이다. 덧붙여 깨어있는 부분과 잠든 부분이 있는게 아닌가 싶지만, 공부가 얇아 직감을 통한 짐작은 멈추겠다.
한국사상, 철학은 나의 뿌리다. 분명 내가 하는 언어에 녹아있는 힘이다. 그러나 그것을 되짚어 보기에는 우리가 먹고, 느끼고, 표현들에 뿌리이외의 것으로 채워져 체질이 다르다. 그리고 한국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조선당대 인물처럼 몸과 마음을 동해야 하는데, 외부에 들어오는 자극과 배움, 언어가 마찰을 일으키는 듯하다. 우리나라의 성격구조가 감정구조가 넘어 인격구조가 한국사상사와 결이 달라졌다. 물론 공부와 실천으로 결을 맞춰 나아가겠지만 그 결로, 길로 가기 위해서는 얼마나 견디는가? 그리고 어떻게 견디는가? 아직 나의 앎(입으로 말하는 것 경험이, 안으로 꽉 차있는 것 지식이)이 미천해서 묻지만 답할 수가 없다.
나의 상상과 진실이 어린 아는 사람의 말씀이 얽어 구절을 읽으면 나는 심장이 뛴다. 몸이 반응한다. 한국화라 칭하는 옅은 그림을 보는 것보다. 진심된 사람의 말을 듣는게 더 와닿았다. 그리고 무지한 사람이 무례할지도 모르게 말을 했어도 진실로서 답변해주시는 교수님의 화상수업의 너머에서 나는 무언가 닿았다. (나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어도) 큰 존재에게 마음을 담아 글을 써본다.
김경호 교수님은 멋진 사람이다. 물론 내 주변에 한분 더 계시지. 혹은 두 분 더. 그분들의 삶을 느낀 것을 써본다. 기대승 행장에 언급을 내 방식으로 단어를 대체해서.
"의당 먼저 나와 상대의 마음을 살펴 의리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하고, 나아가 마음의 움직임, 즉 내 마음이 원하는 바를 명확히 알아서 구차하게 되는 걱정을 없게 하며, 마침내는 목숨을 걸고 나의 길(道)를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나의 길을 가기위해 얼마나 견뎌야하는가? 어떻게 견디나?
우리는 마음을 산발해 말하지만. 정말 마음心이 뭔지 생각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심장心腸도 어떤 연관이 있을까. 너무나도 흥미로운 퍼즐 듯이 즐비하다. 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근원을 알아는 것. 나의 맥락을 알아간다.
한국사상은 맥락, 서양철학은 체계. 거칠지만 명료한 표현이다.
사단이 있는가? 감정은 어디서 오는가? '사단'이라는 말 자체를 알기위해서는 얼마나 알아야 하는가?
기대승의 아는것, 이황, 이이. 북송학자들, 도학, 성리학, 도통, 소크라테스가 아는 것, 플라톤, 스피노자, 데카르트, 칸트, 벤야민과 비트겐 슈타인, 한나 아렌트, 게오르그 짐멜,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조지프 아마토, 알랭 코르벵, 조르주 바가렐로 ,앙리 제로네, 피에르 노라, 르누아르, 고흐, 이-푸 투안,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 요한 하위징아, 루이스 캐롤, 피터팬, 장 자끄 상뻬, 보들레르, 마크 오제,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리처드 세넷, 매린 도시, 에리히 프롬, 제인 제이콥스, 루이스 멈포드, 하이데거, 아들러, 프로이트, 라깡, 미셸 푸코, 헤겔, 팀 크레스웰,
기회주의자가 되지 않으며, 거친땅과 부드러운 땅, 딱딱한 땅하거나 탄력있는 땅, 차가우며 따듯한, 잔인하든 사랑하는, 걷기 좋지 않는 땅과 걷기 좋은 땅을 모두 디디며 견디며 가야는 것. 머리에서 부터 발끝으로 손끝으로 내려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텍스트를 머리에 집어넣어도 발끝까지 내려가기는 어려운데, 머리와 가슴, 가슴과 발. 우리는 설명할수 있을 때까지 공부를 하고 명확하고, 토론하여 다른 사람의 생각과 나누어, 소화시켜야한다. 가슴까지 도달하여 발을 움직이게 해야한다. 혹은 발을 움직여서 가슴에 있는게 움직이도록.
피하지 않고 계속 가야하는 것. 이상과 현실을 같이 이고 가면서 묵묵히 시도하는 것. 김영수, 김춘수, 김영수.
이기를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않으며(저항과 달리) 같이 협력해서 함의해보는 것, 마음의 안정을 통하고 공부하고 토론해서 답은 어렵더라도 차이를 알고 다시 시도하는 것. 협력을 시도하는 것.
우리는 샤프, 펜, 연필을 아주 자연스럽, 친숙하게 쓰고있다.
그러나 우리는 붓으로 부터 시작된 땅에서 태어났다. 붓을 이제 다루지 않으며
그나마 '캘리그라피' 형태와 '서예'의 형태로 잔재, 잠재되어 있으나 휴화산에 가깝다.
활화산은 이제 영역을 혼용되지만 '일러스트', '회화', '사진' 등 선명하고, 구체적인 이미지로서 우리 한국인에게 노출된다. 우리는 고조선, 삼국, 고려의 후예는 뿌리는 옅고, 조선의 후예이나 불교 향내는 옅고, 친하지 않는 유교가 남아있다.
뭐랄까 한 동안 말도 걸지 않았고, 놀아주지도 않았던 부모가 갑자기 중학교가 되어서, 혹은 성인이 되어서 친한척하는 경우와 닮았다. 안타깝지만
그림을 그리다 보면 동양과 서양으로 획일화 해서 나눌수 없는 동시대에 살지만, 지금을 알기위해 엄연히 구분짓고자 한다면, 물건으로서 구분하고자 한다.
'붓'은 수백, 수천가닥의 짐승의 털, 인모, 융을 이용해서 만드는 필기, 그리기 도구이다. 이것은 동양과 서양과 다른게 없지만 서양회화(유화, 템페라)방식과 동양회화를 구분하고자 1400년에서 대헌장 이전까지의 중세에서. 조선과 베네치아를 바라보자.
한국 중세화가들은 세필붓과 큰 붓을 혼용하며 쓰기 했지만, 초상화가 아닌 이상 예선없이 '크로키'처럼 감으로서 재서 체를 점,선,면으로 구현해 낸다. 정확히 서술한다면 쉽표를 사용하지 않고 점선면이 체로 됨을 (가상에서)표현된다.
- 묵액으로 적신 수백가닥의 붓으로 농담으로 단색의 점선면으로 체를 구성
서양은 점, 선, 면으로 구획되며 면밀히 재고 완성당시는 점, 선, 면이 나눠 묶이지만 체로 (가상)자연스럽게 표현된다.
- 단계별 측정한 구도, 비율, 색체의 체계와 단계로 점, 선, 면의 (교차 에칭, 색면)으로 체를 구성.
더 명료하게 나누고싶다.
/크로노스가 신내린 무당. 현대의 만신은 크로노스인가?
/엘레베이터에서의 장소감
/특정 시간과 특정시간에 만나는 사람, 형성되는 장소감
엘레베이터, 분리수거장, 주차장, 마트, 구둣방, 산책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