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고양이가 묻혀야 할 땅은 없다.
이홍범
어젯밤에 비가 내렸다. 시원하다 못해 시리기까지 한 날씨에 그는 7월에 외투를 챙겨 입고 나섰다. 다음날 화창하게 비가 개이고, 햇살이 좋아 낮에 거니는 날씨였다. 아침에 건강보험 잡무를 처리하고 나서 대학원실로 차로 가고 있었다. 날이 좋고, ‘혁오밴드’의 <Paul>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우리의 마음을 돌보자는 내용을 보는 서정적인 노래였다. 가사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버려버렸다. 우리는 늙어 버렸다. 무엇을 잃어 버렸고, 우리는 어떻게 늙어 버렸을까? 항상 푸르를 수는 없겠지.
초등학교 놀이터와 동네 교회 사이 길목을 지날 때, 중앙선을 유심히 처다 보게 되었다. 죽은 아기고양이. 안쓰럽게 벅차오르는 감정은 빠른 차의 속도에 맞춰서 지나쳐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조금 더 솔직해져야 하며, 표현해야한다. 그는 차속에서 갈등을 겪었다. 죽은 고양이를 데리고 가서 묻어 줘야하나, 아니면 그는 오전에 일보느라 공부하지 못한 시간을 빨리 학교에 가야하나. 전날의 지친 교수님과 바쁜 친구의 신뢰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떠오르면 나는 아기 고양이를 데려다 땅에 묻어 스며들지 못할 콘크리트 바닥이 아닌 흙에 품어져야 했다. 인간으로서, 죽음에 대한 애도를 하며 인간으로 남는 것. 죽은 대상을 무의미한 대상이 아닌 의미 지어진 존재로서 대하고 아껴주는 것. 떠밀려지는 기분과 속도들을 거슬러서 다시 아기고양이에게 가기 전 준비를 했다.
그는 나중에 이게 글을 쓸 때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점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스승의 말대로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흐르는 유속과 타성에 맞춰 지나갈 그 흐름을 돌려 고양이에게 갈 준비를 했다.
마트에서 빨간 목장갑, 흰 면장갑을 사야하나. 빨간 목장갑은 대상을 물건처럼 다루게 하는 느낌이다. 그러나 나는 그 고양이를 너무 온전히 느끼고 싶지 않아서 코팅된 빨간 장갑을 샀고, 흰 천을 같이 샀다. 종이 박스도 하나 얻었다. 마지막으로 동네 문구점에 들려 모종삽과 비닐봉투를 샀다.
‘민식이’ 법이 살벌하게 적용되는 주정차 금지구간에 차를 세우고, 고양이를 흰 천으로 덮고, 빨간색으로 코팅된 장갑으로 들어 올려 종이상자에 담았다. 참으로 우리 사회에서 인간은 죽으면 자기가 살던 동네에 묻히지 못하고, 혼자서 살지도 못하는구나 싶다. (으깨진 빨간 덩어리. 검은 털의 몸통과 터져버린 머리. 말 그대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턱의 뼈. 축 늘어진 팔, 다리. )
죽음에서 보여 지는 것들은, 묘한 감정이 들었다. 마트에서 돼지고기를 썰던 정육점 아저씨. 그 고기와 고양이는 무엇이 다른가. 사냥을 위해서 죽은 사냥. 식량으로 쓰이기 위한 가축.
밤에 차에 치여 죽은 아기고양이. 그리고 아침에 뒤에 온 차로 여러 번 밟힌다. 그리고 더 선명히 밟혀진 낮에 또 뒤에 온 차들은 피해간다. 그리고 누군가 데리고 가서 흰 천에 싸여진 채 묻어주었다. 물론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대학원생이 평일 낮에 하는 일이다. 만일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면 애기치 않게 지나치거나, 아니면 나는 그 고양이를 좀 더 동일시 여겼을지도 아니면 이 날에 좀 더 감정적이거나, 또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개인적인 일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 고양이로 인해 약간 슬플지라도, 울지는 않는다.
그는 점심 때 <대왕김밥> 가게에서 ‘돈까스’와 ‘새우튀김’을 시켜 매우 맛있게 먹었으며, 가게에 걸어 도착하기 전에 마주친 닥스훈트 종의 강아지에게 밝게 인사하며, 쓰다듬어 줬다.
맛있게 점심을 먹는 그는 기분이 좋아졌고, 고양이를 잊었다. 다만 아직 처리하지 못한 박스와 박스 안에 남은 고양이의 빨간 피부의 살점이 잠깐 떠오르게 만들었고, 재빨리 박스를 처리했다. 그는 좋은 기억을 만들어, 다시 자신의 기분을 좋게 만들려고 할 것이다. 그는 이 미묘한 감정과 하루의 인상을 가능한 잘 익혀서 침묵하거나, 조심히 이 인상을 가지고 이야기 해볼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한다. 아기 고양이의 시체와 죽음은 유쾌하지 않는 이야기 때문에. 그는 명심해야한다. 우리는 유쾌함을 바라며 죽음은 재빨리 누군가 치워줄 때까지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병원이 생각난다. 죽음은(의 이빨은) 검고, 숨쉬기 힘들며, 다 썩으며, 숨이 넘어간다는 말이. 무슨 뜻이 명확히 알게 된다. 그는 죽음이 고통스러운 순간만 없다면 아주 친숙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지금 좋은 감정과 좋으 관계와 신뢰에 감사한다. 그것들이 없다면 충분히 그를 안팎으로 썩어들며 죽게 만들 것이 그가 사는 세계에 넘치기에.
옅은 빛도 없는 과정에서 그를 다시 살맛을 돌게 하는 그 곳에 대해 그는 그를 던져야한다. 완성시키지 못할 지라도, 나아감에 의미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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