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 읽기

2020. 9. 13. 11:08 from 에세이

『끊어 읽기』

 

- 음절과 음절을 끊어 읽기,

 

 '고', '맙', '습', '니', '다', 말하는 것 과 '고맙습니다.' 위 두 가지 소리내며 읽는 것은 명확히 다르다. 춤을 추는 사람도 동작을 쪼개고, 배우도 프레임단위로 표정을 쪼개고, 무술하는 사람도 동작을 쪼갠다. (가하는 힘, 받치는 힘, 근육, 신경이 근육으로, 혈관으로  미분. 배분. 비유클리드적인 영역를 유클리드적인 영역으로 실현하는 것.)

 

 물론 글과 그림과 같이 평면상에 칠하거나, 타이핑하는 정적변화(내용 시각적인 변화과정은 제외하고, 감상시) 수정을 거듭하는 행위와 춤을 추고 음악하는 사람 연극하는 사람과 다르다. (영상은 좀 더 정리해서 말하자) 

 

 정적인 것을 감상하는 것 동적인 것을 감상하는 것. 공부로서 스투디움과 감상으로서 스투디움은 다를까?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에서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의 예시는 공부로서 '스투디움studium'은 다른가? 

 

 

*수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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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베이터와 꿈

2020. 7. 25. 08:29 from 에세이

 너무 흔한 클리셰와 서사로 엘리베이터로 시간여행을 하는 꿈을 꿨다. 실제로 어이없는 게 어떤 특별한 계기로 가는 게 아니라, 이미 시간여행을 하는 게 준비되어 있었다. 현실에 우리집 엘레베이터의 2대의 엘레베이터 사이에 공고란에 시간여행에 관련된 공고가 엘레베이터에 붙여있었고 꿈속에서 너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기함을 토하고 엘레베이터를 탔다. 그런데 실제로 각 층마다 시간대가 다르지 않는가? 기함을 토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 엘레베이터를 통해 원하는 층에서 엇갈린 듯이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서 조금 더 높은 높이에서 문에서 내려오거나 올라가야만 각 시대를 갈 수 있었다. 뭐랄까 공간으로 따졌을 때, 3개의 시간이 동시에 흐름이 연결되어, 3개의 공간이 동시에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80년대, 90년대 그리고 아무런 시간이 느껴지지 않는 엘리베이터의 공간이 하나가 되었다. 

 어떤 시간대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흑인 여학생이 "질병과 사회학에 대한 연관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내가 답 하길 "어떤면에 정확하게 연관이 있다고 하기에는 힘들지만, 잘못된 구조에서 억압된 몸, 개인은 구조로 인한 정서적 취약과 몸의 취약이 관련될 수 있고, 몸의 취약은 면역력의 저하를 부르고, 면역력의 저하는 질병에 대한 취약해진다는  내용으로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정확히 답할 필요도 없지만 명쾌하지 않은 표정을 짓고 나는 떠나왔다.

 꿈이라는 게 무엇인가? 우리가 사전적으로 말하는 꿈은 수면상에서 일어나는 뇌의 특정작용, 혹은 성취하고자 하는 일을 의미하는 동음이의어다.  수면상에 꿈은 성취로서 꿈과 유사점이 있다면 시각적이고 추상적이다. 추상抽狀이 우리가 속히 말하는 추출해낸 상으로 의미로 이해할 때. 거대한 도시의 하나의 건물 정도. 꿈에서는 한 국가에서 하나의 도시 정도의 규모로 추출되었다. 내가 겪은 꿈에서는 공간을 헤집고 다닌다.

 꿈속에서 몸은 무엇인가? 실제한 것인가? 현실에 있는 정보를 재구성하거나 잠자고 있는 뇌의 잔상같은 것일까. 컴퓨터의 램에 플래쉬메모리에 남아있는 정보들 처럼. 그렇다면 컴퓨터도 꿈을 꾸는 것인가? 컴퓨터도 시간여행을 하는 꿈을 꿀까?

 

 

실상 냄새가 느껴지는 장소는 최근에 없었던 것 같다. 하나의 내게 장소로서 꿈이 있다면, 내가 그리워하는 누군가의 품속에서 품어지는 감각을 느끼는 꿈을 꿨을 때다. 나는 그때 내가 꿈을 꾼것을 알고 있었고, 익숙한 체취와 온기가 구체적으로 기억되었고, 매우 슬퍼졌다. 나는 꿈속에서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러나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꿈은 추상적이고, 냄새가 없다고 묘사하려고 했으나, 우선 내가 강렬히 욕구하거나, 욕망하거나, 갈구하는 게 아닌, 겪고 반성을 통한 경험한 게 아닌 것이라면 냄새가 없다. 그러나 냄새와 피부에서 느껴진 온기는 뭐랄까 내가 알고 있던 꿈을 넘어서는 어떤 순간이었다.    

 

 

 

*다음 글은 무엇을 써볼까, 나는 글을 쓰면서 기쁨을 느끼는가? 나의 스승처럼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빽빽한 밀도찬 글을 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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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고양이가 묻혀야 할 땅은 없다.

이홍범

 

 어젯밤에 비가 내렸다. 시원하다 못해 시리기까지 한 날씨에 그는 7월에 외투를 챙겨 입고 나섰다. 다음날 화창하게 비가 개이고, 햇살이 좋아 낮에 거니는 날씨였다. 아침에 건강보험 잡무를 처리하고 나서 대학원실로 차로 가고 있었다. 날이 좋고, ‘혁오밴드<Paul>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우리의 마음을 돌보자는 내용을 보는 서정적인 노래였다. 가사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버려버렸다. 우리는 늙어 버렸다. 무엇을 잃어 버렸고, 우리는 어떻게 늙어 버렸을까? 항상 푸르를 수는 없겠지.

 

 초등학교 놀이터와 동네 교회 사이 길목을 지날 때, 중앙선을 유심히 처다 보게 되었다. 죽은 아기고양이. 안쓰럽게 벅차오르는 감정은 빠른 차의 속도에 맞춰서 지나쳐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조금 더 솔직해져야 하며, 표현해야한다. 그는 차속에서 갈등을 겪었다. 죽은 고양이를 데리고 가서 묻어 줘야하나, 아니면 그는 오전에 일보느라 공부하지 못한 시간을 빨리 학교에 가야하나. 전날의 지친 교수님과 바쁜 친구의 신뢰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떠오르면 나는 아기 고양이를 데려다 땅에 묻어 스며들지 못할 콘크리트 바닥이 아닌 흙에 품어져야 했다. 인간으로서, 죽음에 대한 애도를 하며 인간으로 남는 것. 죽은 대상을 무의미한 대상이 아닌 의미 지어진 존재로서 대하고 아껴주는 것. 떠밀려지는 기분과 속도들을 거슬러서 다시 아기고양이에게 가기 전 준비를 했다.

 

 그는 나중에 이게 글을 쓸 때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점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스승의 말대로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흐르는 유속과 타성에 맞춰 지나갈 그 흐름을 돌려 고양이에게 갈 준비를 했다.

 마트에서 빨간 목장갑, 흰 면장갑을 사야하나. 빨간 목장갑은 대상을 물건처럼 다루게 하는 느낌이다. 그러나 나는 그 고양이를 너무 온전히 느끼고 싶지 않아서 코팅된 빨간 장갑을 샀고, 흰 천을 같이 샀다. 종이 박스도 하나 얻었다. 마지막으로 동네 문구점에 들려 모종삽과 비닐봉투를 샀다.

 ‘민식이법이 살벌하게 적용되는 주정차 금지구간에 차를 세우고, 고양이를 흰 천으로 덮고, 빨간색으로 코팅된 장갑으로 들어 올려 종이상자에 담았다. 참으로 우리 사회에서 인간은 죽으면 자기가 살던 동네에 묻히지 못하고, 혼자서 살지도 못하는구나 싶다. (으깨진 빨간 덩어리. 검은 털의 몸통과 터져버린 머리. 말 그대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턱의 뼈. 축 늘어진 팔, 다리. )

 

 죽음에서 보여 지는 것들은, 묘한 감정이 들었다. 마트에서 돼지고기를 썰던 정육점 아저씨. 그 고기와 고양이는 무엇이 다른가. 사냥을 위해서 죽은 사냥. 식량으로 쓰이기 위한 가축.

 밤에 차에 치여 죽은 아기고양이. 그리고 아침에 뒤에 온 차로 여러 번 밟힌다. 그리고 더 선명히 밟혀진 낮에 또 뒤에 온 차들은 피해간다. 그리고 누군가 데리고 가서 흰 천에 싸여진 채 묻어주었다. 물론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대학원생이 평일 낮에 하는 일이다. 만일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면 애기치 않게 지나치거나, 아니면 나는 그 고양이를 좀 더 동일시 여겼을지도 아니면 이 날에 좀 더 감정적이거나, 또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개인적인 일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 고양이로 인해 약간 슬플지라도, 울지는 않는다.

 그는 점심 때 <대왕김밥> 가게에서 돈까스새우튀김을 시켜 매우 맛있게 먹었으며, 가게에 걸어 도착하기 전에 마주친 닥스훈트 종의 강아지에게 밝게 인사하며, 쓰다듬어 줬다.

 

 맛있게 점심을 먹는 그는 기분이 좋아졌고, 고양이를 잊었다. 다만 아직 처리하지 못한 박스와 박스 안에 남은 고양이의 빨간 피부의 살점이 잠깐 떠오르게 만들었고, 재빨리 박스를 처리했다. 그는 좋은 기억을 만들어, 다시 자신의 기분을 좋게 만들려고 할 것이다. 그는 이 미묘한 감정과 하루의 인상을 가능한 잘 익혀서 침묵하거나, 조심히 이 인상을 가지고 이야기 해볼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한다. 아기 고양이의 시체와 죽음은 유쾌하지 않는 이야기 때문에. 그는 명심해야한다. 우리는 유쾌함을 바라며 죽음은 재빨리 누군가 치워줄 때까지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병원이 생각난다. 죽음은(의 이빨은) 검고, 숨쉬기 힘들며, 다 썩으며, 숨이 넘어간다는 말이. 무슨 뜻이 명확히 알게 된다. 그는 죽음이 고통스러운 순간만 없다면 아주 친숙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지금 좋은 감정과 좋으 관계와 신뢰에 감사한다. 그것들이 없다면 충분히 그를 안팎으로 썩어들며 죽게 만들 것이 그가 사는 세계에 넘치기에.

옅은 빛도 없는 과정에서 그를 다시 살맛을 돌게 하는 그 곳에 대해 그는 그를 던져야한다. 완성시키지 못할 지라도, 나아감에 의미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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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냇물

2020. 6. 28. 11:51 from 에세이

 물. 우리가 살아가는 대 섭취해야하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섭취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필요한 경우는 무엇이 있을까?

대개 먹는 물이 아닌 물이 가진 의미는 여러 방면에서 설명 할 수 있다. 이제 말라버린 어른의 상투적인 말씨로 답한다면 '수력발전'과 '농사'로 답 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 계곡, 바다, 물놀이를 갈 때, 그리고 배를 탄다는 것에 대해 의미를 둬보고 싶다.

 4대 문명에서는 모두 강을 기반으로 발전되어, 물질적인 발전과 정신적인 발전인 문화를 발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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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의 중년, 노년

2020. 6. 14. 11:08 from 에세이

높게 언덕으로 위로 올라가는 길 아파트 모서리로 동시에 본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둘다 곱슬머리, 한명은 검게, 한명은 희게. 한명은 곧게, 한명은 굽게 두갈래로 본인의 길로 나아간다. 검은색은 보이지 않는곳으로, 흰색은 머리가서 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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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김경호 교수님으로 인해 쓰게 되었다.

 

고봉 기대승의  '기機', '세勢', '사死'에 대한 언급과 ,사단(사단칠정 중 네가지 단서)에 대한 언급이 었다.

 

 선생이 남쪽으로 내려오던 날,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이 모두 한강(漢江)에 나와 전별하였다. 이때 배 안에 앉아 있던 어떤 객이 선생에게 “사대부가 조정에서 처신할 때 시종 명심하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선생이 이에 대해 “기(幾)ㆍ세(勢)ㆍ사(死) 세 글자면 더 말할 것이 없겠지요.”라고 대답하였다. 이 뜻은 대체로 군자가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서 의당 먼저 기미를 살펴 의리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하고, 나아가 시세(時勢)를 알아서 구차하게 되는 걱정을 없게 하며, 마침내는 목숨을 걸고 도(道)를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김경호 교수님께서는 "의당 먼저 기미를 살펴 의리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하고, 나아가 시세를 알아서 구차하게 되는 걱정을 없게 하며, 마침내는 목숨을 걸고 도(道)를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구절을 중요하게 설명하셨는데, 여기서 설명함에 한계가 있었다. 사전에 공부를 하고 꾸준히 실천하지 않는 이상 깊이 탄복하기 힘든 것이다. '일필휘지' 한 번에 붓질로 글 혹은 그림을 완성 하는 것 처럼. 삶 자체가 꾸준한 실천(의리)과  공부가 되지 않으면 임하기 힘든 학문이다. 현대에는 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한국철상, 사상이 '사장 학문', '죽은 학문'이라 슬프게 들리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연관이 없거나, 죽은 것이 아니다. 잠들어 있을 뿐이다. 덧붙여 깨어있는 부분과 잠든 부분이 있는게 아닌가 싶지만, 공부가 얇아 직감을 통한 짐작은 멈추겠다. 

 한국사상, 철학은 나의 뿌리다. 분명 내가 하는 언어에 녹아있는 힘이다. 그러나 그것을 되짚어 보기에는 우리가 먹고, 느끼고, 표현들에 뿌리이외의 것으로 채워져 체질이 다르다. 그리고 한국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조선당대 인물처럼 몸과 마음을 동해야 하는데, 외부에 들어오는 자극과 배움, 언어가 마찰을 일으키는 듯하다.  우리나라의 성격구조가 감정구조가 넘어 인격구조가 한국사상사와 결이 달라졌다. 물론 공부와 실천으로 결을 맞춰 나아가겠지만 그 결로, 길로 가기 위해서는 얼마나 견디는가? 그리고 어떻게 견디는가? 아직 나의 앎(입으로 말하는 것 경험이, 안으로 꽉 차있는 것 지식이)이 미천해서 묻지만 답할 수가 없다. 

 나의 상상과 진실이 어린 아는 사람의 말씀이 얽어 구절을 읽으면 나는 심장이 뛴다. 몸이 반응한다. 한국화라 칭하는 옅은 그림을 보는 것보다. 진심된 사람의 말을 듣는게 더 와닿았다. 그리고 무지한 사람이 무례할지도 모르게 말을 했어도 진실로서 답변해주시는 교수님의 화상수업의 너머에서 나는 무언가 닿았다. (나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어도) 큰 존재에게 마음을 담아 글을 써본다. 

 

 김경호 교수님은 멋진 사람이다. 물론 내 주변에 한분 더 계시지. 혹은 두 분 더. 그분들의 삶을 느낀 것을 써본다. 기대승 행장에 언급을 내 방식으로 단어를 대체해서.

 

"의당 먼저 나와 상대의 마음을 살펴 의리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하고, 나아가 마음의 움직임, 즉 내 마음이 원하는 바를 명확히 알아서 구차하게 되는 걱정을 없게 하며, 마침내는 목숨을 걸고 나의 길(道)를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나의 길을 가기위해 얼마나 견뎌야하는가? 어떻게 견디나?

 

우리는 마음을 산발해 말하지만. 정말 마음心이 뭔지 생각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심장心腸도 어떤 연관이 있을까. 너무나도 흥미로운 퍼즐 듯이 즐비하다. 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근원을 알아는 것. 나의 맥락을 알아간다.

 

한국사상은 맥락, 서양철학은 체계. 거칠지만 명료한 표현이다.

 

 

 사단이 있는가? 감정은 어디서 오는가? '사단'이라는 말 자체를 알기위해서는 얼마나 알아야 하는가? 

기대승의 아는것, 이황, 이이. 북송학자들, 도학, 성리학, 도통, 소크라테스가 아는 것, 플라톤, 스피노자, 데카르트, 칸트, 벤야민과 비트겐 슈타인, 한나 아렌트, 게오르그 짐멜,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조지프 아마토, 알랭 코르벵, 조르주 바가렐로 ,앙리 제로네, 피에르 노라, 르누아르, 고흐, 이-푸 투안,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 요한 하위징아, 루이스 캐롤, 피터팬, 장 자끄 상뻬, 보들레르, 마크 오제,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리처드 세넷, 매린 도시, 에리히 프롬, 제인 제이콥스, 루이스 멈포드, 하이데거, 아들러, 프로이트, 라깡, 미셸 푸코, 헤겔, 팀 크레스웰, 

 

 

 기회주의자가 되지 않으며, 거친땅과 부드러운 땅, 딱딱한 땅하거나 탄력있는 땅, 차가우며 따듯한, 잔인하든 사랑하는,  걷기 좋지 않는 땅과 걷기 좋은 땅을 모두 디디며 견디며 가야는 것. 머리에서 부터 발끝으로 손끝으로 내려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텍스트를 머리에 집어넣어도 발끝까지 내려가기는 어려운데, 머리와 가슴, 가슴과 발. 우리는 설명할수 있을 때까지 공부를 하고 명확하고, 토론하여 다른 사람의 생각과 나누어, 소화시켜야한다. 가슴까지 도달하여 발을 움직이게 해야한다. 혹은 발을 움직여서 가슴에 있는게 움직이도록. 

피하지 않고 계속 가야하는 것. 이상과 현실을 같이 이고 가면서 묵묵히 시도하는 것. 김영수, 김춘수, 김영수.  

 이기를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않으며(저항과 달리) 같이 협력해서 함의해보는 것, 마음의 안정을 통하고 공부하고 토론해서 답은 어렵더라도 차이를 알고 다시 시도하는 것. 협력을 시도하는 것.

 

 

 

 

 

우리는 샤프, 펜, 연필을 아주 자연스럽, 친숙하게 쓰고있다. 

그러나 우리는 붓으로 부터 시작된 땅에서 태어났다. 붓을 이제 다루지 않으며

그나마 '캘리그라피' 형태와 '서예'의 형태로 잔재, 잠재되어 있으나 휴화산에 가깝다.

활화산은 이제 영역을 혼용되지만 '일러스트', '회화', '사진' 등 선명하고, 구체적인 이미지로서 우리 한국인에게 노출된다. 우리는 고조선, 삼국, 고려의 후예는 뿌리는 옅고, 조선의 후예이나 불교 향내는 옅고, 친하지 않는 유교가 남아있다. 

 뭐랄까 한 동안 말도 걸지 않았고, 놀아주지도 않았던 부모가 갑자기 중학교가 되어서, 혹은 성인이 되어서 친한척하는 경우와 닮았다. 안타깝지만 

 

그림을 그리다 보면 동양과 서양으로 획일화 해서 나눌수 없는 동시대에 살지만, 지금을 알기위해 엄연히 구분짓고자 한다면, 물건으로서 구분하고자 한다.

 

'붓'은 수백, 수천가닥의 짐승의 털, 인모, 융을 이용해서 만드는 필기, 그리기 도구이다.  이것은 동양과 서양과 다른게 없지만 서양회화(유화, 템페라)방식과 동양회화를 구분하고자 1400년에서 대헌장 이전까지의 중세에서.  조선과 베네치아를 바라보자. 

 

한국 중세화가들은 세필붓과 큰 붓을 혼용하며 쓰기 했지만, 초상화가 아닌 이상 예선없이 '크로키'처럼 감으로서 재서 체를 점,선,면으로 구현해 낸다. 정확히 서술한다면 쉽표를 사용하지 않고 점선면이 체로 됨을 (가상에서)표현된다.

- 묵액으로 적신 수백가닥의 붓으로 농담으로 단색의 점선면으로 체를 구성

 

 

서양은 점, 선, 면으로 구획되며 면밀히 재고 완성당시는 점, 선, 면이 나눠 묶이지만 체로 (가상)자연스럽게 표현된다.

 

- 단계별 측정한 구도, 비율, 색체의 체계와 단계로 점, 선, 면의 (교차 에칭, 색면)으로  체를 구성.

 

더 명료하게 나누고싶다.

 

 

/크로노스가 신내린 무당. 현대의 만신은 크로노스인가?

 

/엘레베이터에서의 장소감

 

/특정 시간과 특정시간에 만나는 사람, 형성되는 장소감

엘레베이터, 분리수거장, 주차장, 마트, 구둣방,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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