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reaserch)라는 어휘는 그리스어 '쩨테시스zetesis'에서 비롯된다. 이 어원은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혹은 내가 무지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연구는 이러한 개념적 의미 맥락을 담은 어휘다
우리가 속히 소크라테스의 격언으로 착각하는 델포이 신전에 격언과 유사하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처럼 말이다.
이러한 '자기의식', 자기를 아는 것, 참으로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행위다. 외부의 세계를 인지하면서 외부를 인지하는 주체인 자기자신을 인식한다. 그 다음 자기를 대상적 의식을하여 혹은 상대화하여 객관적으로 봐라본다. 단순한 사실만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내 기분, 내 몸의 상태, 욕구 등의 단편적인 사실 수준에서 말이다. 그것에서 더 나아간다면 "왜 나는 이런 기분이며, 이런 몸의 상태를 가지고, 이런 욕구를 가지는가"의 질문을 시작으로 우리의 과거를 짚어가 현재에 이르기 까지의 사건적 역사를 추적하거나, 그럴 수밖에 없던 이야기를 찾는다.
헤겔에 따르면 단편적인 자기에 대한 사실의 원인을 질문하므로서 찾는 역사들을 인식하고 서사를 인식하는 것은 "개념적 인식"이다. 앞서 자신의 사실을 아는 것은 "대상적 인식" 수준(혹은 층위, level)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이 개념적 인식이다. 이 두 가지의 인식 방법의 추적과 두 가지 인식 사이의 횡단사이에서 자기를 알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자기의식'이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 헤겔은 항상 거기있는 타자 혹은 대자를 염두하고 여기 있는 자기 혹은 즉자를 염두하는 사이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 횡단을 요구한다. 상대가 가진 권위를 따르는 것, 모방하는 것 그리고 차이를 알아내는 것이 관건 인 것 같다.
내가 아무리 풍문으로 듣는 이해를 내게 접목하는 순간 몸에서 느껴지는 아직 반성하지 못한 체험적인 친근감이 있다. 그러나 머리로는 아직 충분히 양적으로 알지는 못한다. 반면 내 애인은 철학전공자로서 '헤겔'을 전공했지만, 그것은 불행한 결혼과 같았다. 더 나아가 자신과 접촉하거나 안아주지 않는 권위가 있는 배우자를 만난 것과 같았다.
내 애인은 루소가 말하듯 타인의 기대의 갈등속에 있는 해방을 요구하는 것처럼, 일상에서 타인과의 관계가 부담이 된다. 또한 존경하는 스승의 업무를 이행하는 것도 부담, 그녀가 속한 가족, 직장, 친구 등 그녀의 모든 사회관계망이 그녀를 (관계의)그물코 하나하나가 바늘이 되어 꿰어지고 짊어지는 망태기 속에 갇힌 것처럼 그녀를 버겁게 한다. 오히려 타자와 관계를 톡해 도야 혹은 상생상승, 즉 성장하는 헤겔의 입장은 그녀에게 경험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프롬이 말하는 '사회의 요구'처럼 성실하게 살라고 말하는, 너의 감정보다 너의 의무를 생가하는 것처럼 살아왔다. 그런 그녀에게 중매쟁이와 같은 주위 사람들과 그녀의 삶은 헤겔과의 불행한 결혼을 맺게 한다.
음식과 술의 궁합을 불어 '마리아주(mariage)'라고 하던가. 그녀의 몸과 취향은 더 큰 범주와 지향점은 헤겔일 수 있다. 그러나 타자와 외부 세계가 큰 자극이자 고통인 그녀에게는 헤겔은 엄격하면서도 단호한 권위자이자 자신을 봐주지 않은 존재일 뿐이였다. 그녀는 석사논문을 헤겔로 썻다.
근래에 와서 그녀가 헤겔과 불행한 결혼을, 지금의 그녀에게는 궁합이 맞지 않는 대상이였다. 오히려 그녀의 입장을 나란히 서주고 공감해줄, 나란히 서줄 '타인으로부터 받는 고통'을 공명해주는 선행자와 선생, 그 무엇이 필요했다. 그녀로부터 시작하는 공명에서 사실 타자와의 관계를 통한 성장이 지양해야하는 이론과 방법적 학문(앎)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평생 그녀는 자신이 겪는 소외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고통과 자극으로부터, 자기자신을 미워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녀에게 홉스, 로크, 루소 그리고 니체에 이르는 개인(개별적인 주체자) 혹은 인간(관계적인 것)으로부터 무엇에 질려버린 사람들이 말들이 필요해 보였다. 데카르트, 칸트, 맑스, 아도르노, 짐멜, 에바 일루즈, 기든스, 그리고 에리히 프롬 등의 타자와 타자의 관계 그리고 그걸 넘어서는 구조들을 말하기에는 그 관계망은 내 작은 신, 내가 돌보므로서 나를 돌보게 하는 존재는 다른 죽은 이들의 글과 말들이 필요하다.
* 메모
데카르트_『방법서설』
칸트_『계몽이란 무엇인가』
맑스와 앵겔스_『독일 이데올로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_「대중기만으로서 문화산업」, 『계몽의 변증법』
짐멜_ 김덕영, 「대도시인의 정신적 삶」, 「감각의 사회학」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 배우, 돈에 관한 맥락
에바일루즈_ 『사랑은 왜 아픈가』, 『감정 자본주의』.
들뢰즈와 카타리_『천개의 고원』
미셸 푸코_"구조주의"와 "자기배려(돌봄)" 개념
벤야민_『아케이드 프로젝트』
앤소니 기든스_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 친밀성의 구조변동』
전진성_ 『상상의 아테네』
이용규_ 『혼종문화론』
존 리_ 『케이팝』,『자이니치』.
크리스토퍼 스몰_ 『뮤지킹 음악하기』
헤겔_『정신현상학』
권미원_『장소 특정적 미술』
에리히 프롬_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랑의 기술』, 『소유냐 존재냐』
한나 아렌트_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요제프 멩겔레도 연관 짓기 가능하겠다.
프랭크 터너_『예일대 지성사 강의』
팀 크레스웰, 도린 메시,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 에드워드 렐프, 마르크 오제,
골드헤이건 W. 세라, 이-푸 투안, 알랭 코르뱅 / 권단, 김기홍
미지의 학자들:
듀이, 허버트 미드, 마가렛 미드, 프로이트, 아들러, 흄. 하이데거, 니체, 비트겐슈타인. 루소
슬라보예 지젝, 한병철, 디디에 에리봉, 아자 가트 / 동양철학 지성사 궁금하다: 공자, 맹자, 노자/ 제자 백가/ 기대승, 주자의 도통
한자와 영문, 독일어를 배우고 싶네.
* 추가문, 그녀와 대화 후에 쓴 짧은 글이다.
다음 아래와 같다.
나의 작은 신
나의 주체위에 얹어 있는
내가 돌보므로서 나를 돌보게 하는 존재
안으로 향해 밖으로 나가는 자유를 찾는 존재
심해와 심연의 압력은
깊이 들어 갈 수록
순수한 내외부가 일치하는 단순한 것은 찌르러지지만
통조림과 같은 내외부가 있는 딱딱한 것과 물렁한 것이 공존하는 것은 견뎌낸다.
심해어는 신체 비중이 물과 기름으로 변화해 심해에 맞춰 찌그러지지 않는다.
심해어처럼 심연과 닮은 생명이 되던지
깡통처럼 심연을 견디는 사물이 되던지를
그녀는 항상 자신의 머리를 던져버리고 싶을 만큼 고민에 빠져있다.
나의 작은 신의 작은 머리와 볼은 소중하다.
나는 그녀가 깊은 물속의 생명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그녀가 심연을 견디는 사물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그녀가 책을펴고 하얀 땅위에 검은 나무들을 날아다니며 활개하는 것처럼
그녀가 책밖에서 마주하는 다른 무엇들과도 화해하고 나아가기를 소원한다.
그것들에 치여서 깊은 바다와 덩쿨에 얽히고 가라않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이입(empathy)과 하품(sympathy, 쉼파테이아, συμπάθεια)의 바다의
작은 거북이
그녀가 가라앉든지, 다시 나아오르기 전에
그저 나의 등위에서 앉아서 쉬기를 바란다.
낮이오면 햇살을 맞이하고, 밤이오면 온음의 달빛을 맞고 자는 것
낮에 햇살이 온기가 맺고 밤에는 어둠이 포근하게 덮고
아침밥, 점심밥, 저녁밥
우선은 그것부터, 무엇을 하라고 말하기 전에
우선 먹고, 자고, 쉬라고
그리고 흔들리지 않게 끌어서 안아주기
무언가 툭 떨어질 때 받쳐주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확신을 채워주기, 어렵지만 해보기
그 어려운 것들을 하려면 나도 변해야혀
맨날 자기가 찡찡댄다고 자기를 미워지 않냐는 말하는 게 참으로 슬프지만
언제가 자기가 찡찡댄다고 좋지 않냐고 말하게 만도록 같이 뭔가를 해봐야겠다.
거, 그렇게 노는 거 꽤 재밌다.
'전체 글'에 해당되는 글 46건
- 2022.04.06 경험과 아는 것의 괴리
- 2020.10.01 심장이 있는 사람
- 2020.09.23 탈고 脫稿
- 2020.09.13 끊어 읽기
- 2020.09.09 문화
- 2020.09.04 지금 사람의 무언가를 보고자 할 때 20200904 #1
신화적 시인들은 심장을 모든 사려의 자리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영웅들은 심장 속에서 그들의 걱정을
“움직이고”(agitabant), “흔들고”(versabant), “되돌렸던”(volutabant)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감정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한 어떤 일도 할 생각을 하지 않을 정도로 우둔하고 무분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틴어에서는 “현자”를 “심장이 있는 사람”(cordati)이라고 불렀고
그 반대로 “바보”를 “심장이 없는 사람”(vecordes)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들은“결심”을 “느낀 것”(sententiae)이라 불렀다. 왜냐하면 그들은 느낀 대로 판단했으며, 따라서 영우들의 판단은 질료에 있어서는 그를지 몰라도 형상에 있어서는 언제나 옳기 때문이다[825].
잠바티스타 비코 『새로운 학문 Scienze Nuoba』, 조한욱 옮김, 아카넷, 2019, p.582
원고 쓰기를 마치는 것. 순화어는 `원고 끝냄'. ↔기고(起稿).
몇번을 원고를 끝내야 하나?
원고4 (原稿)
[명사]
1. 인쇄하거나 발표하기 위하여 쓴 글이나 그림 따위.
2. 초벌로 쓴 원고.
『끊어 읽기』
- 음절과 음절을 끊어 읽기,
'고', '맙', '습', '니', '다', 말하는 것 과 '고맙습니다.' 위 두 가지 소리내며 읽는 것은 명확히 다르다. 춤을 추는 사람도 동작을 쪼개고, 배우도 프레임단위로 표정을 쪼개고, 무술하는 사람도 동작을 쪼갠다. (가하는 힘, 받치는 힘, 근육, 신경이 근육으로, 혈관으로 미분. 배분. 비유클리드적인 영역를 유클리드적인 영역으로 실현하는 것.)
물론 글과 그림과 같이 평면상에 칠하거나, 타이핑하는 정적변화(내용 시각적인 변화과정은 제외하고, 감상시) 수정을 거듭하는 행위와 춤을 추고 음악하는 사람 연극하는 사람과 다르다. (영상은 좀 더 정리해서 말하자)
정적인 것을 감상하는 것 동적인 것을 감상하는 것. 공부로서 스투디움과 감상으로서 스투디움은 다를까?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에서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의 예시는 공부로서 '스투디움studium'은 다른가?
*수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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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른이 되어서, 성인이 되어서도 무언가 사람을 다시 보고자, 알고자 하는 욕구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실패하고, 겪고 다시 돌이켜 보는지. 무엇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매번 지칠 때 쯤 다시 싸우게, 마주하게, 부정하면서 찢어지고, 어렵사리 아니라고 말하면서 나아가는가? 그런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게된 순간의 시발점은 어릴 때의 사랑하는 마음과 신뢰에 대한 겪는 것의 체험과 경험(몸으로서 겪고 반성하든 반성하지 않든) 사랑하는 대상이 있었다는 증거와 같은 것 같다.
내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인정하고 바라보는 행위이다. 어떻게든 관계하고 상대를 그 상태로가 아닌 다른 것으로 관계 맺는 것, 그림을 그릴 백장지이든 흑장지이든, 까맣고 하얗게, 다른 것을 메꾸고 얹는 것을 반복해야한다.
밥아저씨에 말에 의하면 어둠에 어둠을 칠하면 변함이 없고, 빛에 빛을 칠하면 변함이 없다. 어둠에 빛을 칠하고, 빛에 어둠을 칠하고 반복되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기쁨이오든 슬픔이오든 무언가를 계속 행한다는 것, 행한다는 것 자체에 정화Catharsis. 그런 태도에 (본 받고) 뿌리를 내리고 싶다.
자신이 혐오스러워 몸서리 칠 때쯤, 그리는게 즐겁지 않고, 타인의 시선과 나의 시선에 의식하며 그리는 그림은 즐겁지 않다. 행위자체 보다 만들어진 것에 초점을 맞춰질 때 즈음. 몸서리치게 내가 미워진다. 다시금 신물이 올라와 그러려니 그림을 그리지 않고 항상 미완성으로 끝낸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잘 듣는것이라 친구가 말했다. 환대하는 말을 할 강박을 참고, 우선 상대의 말과 안으로서 말을 넣어 쌓아보자. 그게 지금 필요한 것 같다. 혼란스러운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