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박히고 싶은, 적당한 관심의 대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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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죠의 일지 - 131화. 소심이는 관종의 꿈을 꾸는가
131화. 소심이는 관종의 꿈을 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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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죠의 일지의 저자는 일상툰을 그리는 작가이다. 작가의 일상을 바라 봤을 때. 게오르그 짐멜에 설명에 따르는 대도시인의 기질. '관심을 욕구 하는 사람들'의 특성이 보인다. 그러나 1900년대의 대도시인의 특성에서 작가의 차이는 지금의 사람들은 너무 과한 관심을 받는 것은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작가의 개인적인 특성이라 치부할 수 있다. 우선적으로 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풍경』 에 '대도시인의 정신적 삶'의 장에서 현재 우리 현대인의 특성을 잘 구술하고 있다. 나는 현대인의 분석하기 위한 근거로서 참고사료, 참고서적 참고문헌 위 언급한 서적을 기반하고자 한다.
『모죠의 일지』는 아주 탁월한 작품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대중의 사람들이 사랑한다. 그 이유는 공감이 되며, 어떤 상황들에 대하여 스스럼없이 나열하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매력적으로 여길 수 밖에 없던 작품이다. 물론 사실을 조합하여 어떤 진실을 도출을 의도하는 맥락은 없으나, 작가가 서술한 일상의 진술은 매우 대도시인의 특성에 부합되는 것이 많다.
본 웹툰에서 감상 중 착안 된 지점을 짐멜의 대도시인 특성과 교차 및 비교하여 현재의 현대인의 특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위 참고 문헌에서 나오는 주요 대도시인의 개념은 '과민함', '둔감함', '계산적 관계', '관종' 등의 특성이 보인다. 여기서 내가 흥미롭게 보는 개념은 '관종'이다. 속된 말인 '관심종자'의 줄임말이지만, 조금 순화하여 '관심觀心'이 필요한사람, 봐라 봐주는 마음이 필요한 사람이라 표현하겠다. 여기서 질물은 사람에게 봐라보는 다는 것과, 봐라보임을 당하는 것은 어떤 차이 인가? '봐라보임을 당한다.'라는 표현은 수동적이고, 강제적인 어구로 되므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리한다면, 누군가 나를 봐라본다는 것, 내가 누군가를 본다는 것은 어떤의미를 가지는가? 그리고 왜 보는가? 그리고 대도시인은 왜 그렇게 봐라봐주길을 봐라는 것일까?(존재의 성립과 연관되어 있어보인다. 조금 더 서술하기 위해서는 자료가 필요하다. 존재에 관련한)
'관종'은 저자가 책을 저술한 1900년초 에도 관종의 특성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기반에는 인구가 100만명이상, 자생할 수 있는 인구가 도달하고, 환경이 구추되는 대도시가 성립되었을 때. 위 개념의 특성이 발현된다. 지도교수님 께서 말씀 하신 것 중에 중국에서 수많은 인파에 휩쓸렸을 때 자신의 존재는 없는 것과 같았다는 말씀을 하셨다. 대도시의 수 많은 공간과 장소에서 나의 공간과 장소를 찾는게 힘들 듯이, 벗어나서 그런 공간과 장소를 찾듯이, 자신의 존재도 너무나 많은 존재들 사이에서 구별되지 않고 동일화 혹은 단일화가 되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화려한 옷, 극적인 말투, 과한 노출, 패션 등의 요소로 분출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 관련사항 중에는 예전일로 비트코인으로 돈을 벌어 클럽에서 하룻밤에 1억을 쓰는 과시욕(소비하는 것을 보여주므로서 충족, Flex해버렸지 뭐야)의 일이 생각난다. 이것은 짐멜의 『돈의 철학』에서 짚어보면 좋을 듯 하다. 아름답고 욕구하게 만드는 자극적인 몸, 충족하는 감각들을 찾는 사람들(오감을 통해, 먹방, 몸캠, 뿌리없는 감정들, 허구들, 탈감정 사회)
* 영상, 게임, 만화, 오감을 통한 가상들. 이것들이 마주한 괴로움을, 해야할 일을 피하기위한 매체가 아니라 조금 더 더 자기 배려 할 수 있는 매체가 되면 좋겠군.
* 소비의 맥락은 물 한모금 머금지 못한 매마른 입에서 냉장고에 있던 촉촉한 포도알을 껍찔 채 입에 머금고 즙을 빨아 먹는 것과 같다. 진짜 물을 마셔야 해결 되는 거지, 포도만 계속 먹는다고 해서 해결 되지 않는다. 맥도널드의 진짜 밀크쉐이크와 밀크쉐이크처럼 맛이나는 합성 음료인지 구분 못한채로 먹다보면 우리의 몸 생태는 망가지겠지. 진짜 물을 마셔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는 물을 직접 어떻게 구하고 정수해서 먹는지 모르고 물을 사먹어야 하지만. (내가 지금 서술하면서 무언가를 감지는 했지만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서술은 힘들다. 도대체 내가 말하는 행간에서 무엇을 느낀것일까?)
*흥미로운 만화 댓글들
세미관종 진짜관심 받고싶은데 막상 받으면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관심 못받으면 섭섭한데 또 관심받으면 부끄러워서 피하고 싶음
내향형 관종
나 밖에선 말 겁나 없는데 엄마랑은 겁나 떠들어...그래서 밖에선 친구가 없어... 문제는 우리엄마도 그래... 엄마랑 나랑 베프야...
맞아요 마치 화려하면서 수수하게 해주세요하는 클라이언트 같은 존재 관심받고 싶지만 관심받기 싫어
*적당한 결론
만화와 댓글들을 봤을 때. 봐라보는 것을 원하지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관심은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시선을 마주하고 시선을 해석하는 몸과 머리에서 과부하가 온다.
현대인의 말에는 행간이 있다는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친구의 말에는 사람들의 자체 꺼내지는 말에 '신뢰'가 없다. 말하는 사람도 스스로 자신의 감정과 말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용해서 쓴다. 이게 쉬운게 아니다. 감정의 서사와, 말의 서사, 논리의 서사를 분리하면서 봐라본다는게 거의 주 대화하는 사람들의 이외의 타인이 있어야 관조가 가증하다. 혹은 훈련을 통한 사람들을 통해서.
그렇다면 현대인은 참으로 슬픈 존재다. 자신들의 존재와 지금, 여기에 있음을 끊임없이 인정받으려고 하나, 자신의 존재를 꺼내는 법도, 존재를 인정하는 법도, 그리고 그것을 통하는 방식이 타인과의 대면과 언어를 통해야 하는 것인데 우리는 말하는 법도 점점 잃는 듯하다. (파토스, 로고스, 에토스) 그리고 사람을 인간으로서 충족하게 만드는 만드는 것도, 노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어느 방향의 지향성이 생긴 듯 하다.(호모 파베르, 호모 루덴스, 호모 사피엔스). 여기서 말하는 언어는 육성언어만 말하는 게 아니다. 그 영향에는 스마트폰과 매체의 발달이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사람이 관계로 해소해야할 욕구를 유튜브, 넷플릭스나 IP Tv로 자신의 기호에 맞는 콘텐츠로 해소하는 사람들이 급증한다. 외부에서 하는 익스트림이나 운동하는 사람은 관련 자료가 미흡하므로 좀 더 조사가 필요하다. 우선 자신의 거처에서 벗어나지 않느 사람들을 중심으로 다뤄봐야 할 듯
'슬픔'이라는 단어가 없는 부족에서는 우리게 말하는 슬픈일이 생길때. 슬픔이라는 감정이 남아 상기되기도 전에, 마을 구성원 모두가 가서 슬픔을 느끼는 대상을 포옹하고 같이 운다. 슬픔이라는 말이 남기도전에 같이 나눠서 날려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슬픔'이라는 단어가 없다.
*메모(사야할 책)
팔리 모왓 지음/장석봉 옮김/달팽이/2009
무탄트 메시지
로 모건 저
정신세계사 출판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길치(공간, 장소 길치)와 감정 서사 읽기의 연관성